←
🗂 타인의 계절 — 카드로 보기
📖 ⬇
타인의 계절

타인의 계절

서용준
타인의 계절
1권 손님이 오는 밤 1장 혜원은 그 꿈을 예정일을 사흘 앞둔 밤에 꾸었다. 부엌이었다. 좁고 낮은 부엌.
나무 도마 위에 콩나물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누군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혜원은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증조할머니였다.
혜원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다. 사진으로만 본 얼굴인데, 꿈속에서는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왔니." 증조할머니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혜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콩나물 꼬리를 떼는 손이, 자기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앉아서 꼬리를 떼다 보면," 증조할머니가 말했다.
"생각이 없어져. 그게 좋더라." 혜원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그냥, 아주 오래된 어떤 것과 마주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곧 오겠구나." 증조할머니가 문득 말했다. "뭐가요?" "네 딸." 증조할머니가 대답했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손끝은 여전히 콩나물 꼬리를 떼고 있었다. "손님 많이 받을 아이야." 혜원은 그 말의 뜻을 묻고 싶었는데, 꿈은 그쯤에서 흐려졌다. 콩나물 냄새와 나무 도마의 감촉만 남기고, 부엌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눈을 떴을 때, 혜원은 진통을 느꼈다. 소이는 그날 새벽에 태어났다. 작은 병실, 창밖으로 아직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혜원은 아이를 품에 안고, 문득 어젯밤 꿈을 떠올렸다. 손님 많이 받을 아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혜원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혜원의 집안 여자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이상한 체질이 있었다. 이름도 없는 그것을, 할머니는 그냥 "손님"이라고 불렀다. 잠들 때마다
오는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예고도 없이, 누군가의 기억 한 조각이 꿈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죽은 사람일 때도 있었고, 살아 있는 낯선 사람일 때도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냥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혜원 자신도 손님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기도 전부터 손님 얘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혜원은 품에 안긴 딸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 아이는 자신보다
더 많은 손님을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이름은 소이라고 지었다. 특별한 뜻은 없었다.
그냥 부르기 편하고, 어감이 좋아서였다. 준영은 옆에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더니,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이야." 혜원도 낮게 그 이름을 불러봤다.
아이는 대답 대신 작게 몸을 뒤척였다. 특별한 뜻은 없는 이름이었지만, 혜원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젯밤 꿈속 증조할머니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손님 많이 받을 아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혜원은 벌써부터 그 말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소이가 처음 손님을 맞은 건, 태어난 지 보름째 되던 밤이었다.
혜원은 그날 밤, 아이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달라진 걸 느꼈다. 평소보다 깊고, 느리고, 어딘가 다른 리듬이었다.
혜원은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었다.
갓난아기가 꾸는 꿈이 뭘까, 혜원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 밤 소이의 꿈에 찾아온 손님이 누구였는지, 혜원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소이는 아직 말을 할 줄 몰랐으니까.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혜원은 아이의 손끝에서 이상한 걸 봤다. 아직 손톱도 다
자라지 않은 그 작은 손가락이, 마치 뭔가를 다듬는 것처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콩나물 꼬리를 떼는 손짓과,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혜원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벌써 왔구나." 창밖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혜원은 아이를 품에 안고, 이 아이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밤들을 생각했다. 두렵지는 않았다.
그냥,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어떤 일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느낌이었다. 소이는 그렇게,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첫 손님을 맞았다. 앞으로 살아갈 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이 아이의 밤을 찾아올지,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2장 백일이 가까워질 무렵, 소이는 두 번째 손님을 맞았다. 이번엔 혜원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소이는 평소와 다른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옹알이도 울음도 아닌, 낮고 일정한 숨소리. 혜원은 아기 침대 옆에 앉아, 그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눈을 떴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로 혜원을 한참 쳐다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혜원은 그 눈빛에서 뭔가 다른 기색을 느꼈다.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 같은, 그런 눈빛.
"누구였을까." 혜원은 남편 준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가?" 준영은 아직 이 집안의 체질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혜원도 굳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없었다.
말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고, 무엇보다 준영이 이상하게 여길까 봐 두려웠다. "아니야, 아무것도." 혜원은 얼버무렸다.
그날부터 혜원은 작은 수첩 하나를 마련했다. 소이가 유난히 다른 숨소리로 잠든 날, 혹은 유난히 낯선 표정으로 깨어난 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날짜, 시간, 그날 소이의 미세한 행동 변화.
대단한 근거는 없었지만, 혜원은 그렇게라도 뭔가를 남겨두고 싶었다. 두 번째 손님이 남긴 흔적은 뜻밖의 곳에서 나타났다. 생후 백일이 지난 어느 날, 혜원은 소이를 안고 시장에 갔다.
좌판에 늘어선 채소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소이가 갑자기 한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생선 가게였다. 은빛 비늘이 반짝이는 고등어들이 얼음 위에 늘어서 있었다.
소이는 그 생선들을 보며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치고 조용해졌다. 손을 뻗어 허공에서 뭔가를 다듬는 시늉을 했다. 손질에 익숙한 사람의 손짓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혜원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갓 백일 지난 아기가 생선을 보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 혜원은 그날 늦은 밤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생선 손질하던 손님이었던 것 같다. 시장에서 반응. 남자였을까, 여자였을까.
알 수 없음." 시간이 지나며, 혜원은 조금씩 패턴을 발견했다. 특정 냄새, 특정 소리, 특정 손짓처럼 소이가 낯선 반응을 보이는 순간들은, 대개 그 전날 밤 유난히 다른 숨소리로 잠들었던 날과 겹쳤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혜원은 점점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 늦은 밤, 혜원은 잠든 소이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이 작은 아이가 벌써 몇 명의 낯선 삶을 스쳐 지나갔을까. 그 사람들은 어디서 왔고, 왜 하필 이 아이에게 왔을까.
혜원 자신도 몇 명의 손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무렵, 딱 한 번.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노인이 꿈에 나타나, 오래된 편지를 쓰던 손짓을 남기고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혜원은 며칠 동안 이유 없이 손끝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는 손님이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런데 소이는 벌써 두 번째였다.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되어서. 혜원은 문득 증조할머니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손님 많이 받을 아이.
그 말이 예언이라기보다는, 그냥 담담한 사실을 미리 알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에서 늦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혜원은 잠든 소이의 이불을 다독이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수첩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페이지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3장 수첩을 쓰기 시작한 지 두 달쯤 됐을 무렵, 혜원은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손님 오는 거 말이야." 전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왜, 소이한테 왔어?" "응. 벌써 두 번째야." "두 번째?"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백일도 안 됐는데?" "응."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혜원은 그 침묵 속에서, 어머니도 뭔가 짐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엄마도 기록했어? 손님들?" "아니." 어머니는 짧게 대답했다.
"다들 그냥 넘어갔지. 기억하려고 해도 잘 안 남더라. 손님 다녀간 다음 날은 이상하게 그 전날 일이 흐릿해." 혜원은 그 말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자신도 그랬다. 스무 살 무렵 그 손님을 만난 밤, 자세한 정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손끝이 저릿했던 감각과, 편지를 쓰던 손짓의 느낌만 남아 있었다.
"근데 소이는 다를 것 같아." 혜원이 말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시작됐잖아. 이러다가 나중에 뭐가 자기 기억이고 뭐가 손님 기억인지 헷갈리진 않을까." 어머니는 그 대답에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서 기록해두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그날 이후로, 혜원은 수첩 쓰는 일에 더 정성을 들였다. 단순히 날짜와 반응만 적던 것에서,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써나갔다.
소이가 그날 보인 표정, 손짓, 평소와 다른 울음소리의 종류. 나중에 소이가 자라서, 이 기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은 수첩 맨 앞 장에 이렇게 적었다.
"소이에게.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엔, 아마 스스로도 손님이 무엇인지 알게 됐겠지. 그런데 혹시 헷갈리는 순간이 오면, 여기 적힌 것들을 봐.
이건 다 네가 아직 말을 못 할 때, 엄마가 대신 지켜본 것들이야." 그렇게 적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손님이라는 것이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였지만, 적어도 소이가 혼자 그걸 감당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주 후, 세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이번엔 혜원도 그 밤의 숨소리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낮고, 아주 천천히 이어지는 숨. 다음 날 아침, 소이는 창문 쪽을 한참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마치 뭔가 열려 있던 것을 찾는 몸짓이었다.
혜원은 그날의 기록에 이렇게 썼다. "세 번째 손님. 창문, 혹은 문.
뭔가를 열던 사람이었을까. 알 수 없음. 그러나 소이의 표정은 평온했다." 수첩은 그렇게, 한 장씩 채워져 갔다.
혜원은 그것이 언젠가 소이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 되리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4장 돌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소이는 걷기 시작했다. 첫걸음을 뗀 날, 혜원과 준영은 거실에서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소이는 뒤뚱거리며 몇 걸음을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걸었다. 평범한 성장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의 어느 밤, 혜원은 소이가 걷는 방식에서 뭔가 낯선 걸 느꼈다.
소이는 마치 이미 걸어본 적 있는 사람처럼, 유난히 안정적으로 발을 디뎠다. 아기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었다. 혜원은 그 밤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걷는 게 너무 자연스럽다. 손님의 영향일까, 아니면 그냥 소이가 원래 잘 걷는 아이인 걸까. 구분이 안 됨." 이 무렵부터, 혜원은 소이의 행동에서 손님의 흔적을 구분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아이는 자라면서 원래도 많은 걸 스스로 익혀갔다. 그 자연스러운 성장과, 손님이 남긴 낯선 습관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후, 소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 나무 블록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블록을 쌓는 방식이 이상했다. 무작정 위로 쌓는 게 아니라, 마치 뭔가 순서를 아는 것처럼 특정 모양으로 배열했다. 작은 담장처럼, 혹은 낮은 울타리처럼.
혜원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물었다. "소이야, 그거 뭐 만드는 거야?" 소이는 대답 대신, 블록 하나를 조심스럽게 더 얹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완전한 문장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단어 하나였다. "우리." 혜원은 그 단어에 순간 멈칫했다. "우리"라니.
울타리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소이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계속 블록을 쌓아나갔다. 잠자리에 든 그날 밤, 혜원은 준영에게 처음으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소이가 좀 특이한 거 알아?" "특이해? 뭐가." 준영은 텔레비전을 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가끔 이상한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 혜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우리 집안에, 그런 게 있어. 꿈에 낯선 사람들 기억이 오는 거." 준영은 그 한마디에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고 혜원을 쳐다봤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혜원은 뭐라고 더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왔지만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게." 혜원은 결국 그렇게 말을 흐렸다.
준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요즘 육아로 예민해졌나 보다, 생각하며 넘어갔다. 혜원은 그런 남편의 반응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외로웠다.
이 무게를 온전히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거실 한쪽에서, 소이는 여전히 블록으로 낮은 울타리를 쌓고 있었다. 쌓고 나면, 그 안에 작은 인형 하나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마치 누군가를 지키려는 몸짓처럼. 5장 준영은 아내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했다.
며칠 뒤 밤, 준영은 혼자 소이를 재우는 당번이었다. 혜원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나간 날이었다. 준영은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방을 서성였다.
소이는 금방 잠들었다. 그런데 잠든 지 얼마 안 되어, 소이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바뀌었다. 낮고, 일정하고, 평소보다
훨씬 깊은 리듬. 준영은 그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지만, 혜원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준영은 아이를 눕히고, 한참을 옆에 앉아 지켜봤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아기가 잠든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방 안 공기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기운이었다. 준영은 그걸 애써 무시하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소이가 유난히 낯선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이. "소이야, 아빠야." 준영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소이는 잠깐 그를 빤히 보다가, 이내 평소처럼 웃었다.
그 짧은 순간의 낯섦이, 준영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날 저녁, 혜원이 돌아오자 준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소이, 뭔가 좀 이상했어." 혜원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어." "그게 진짜야? 당신이 말한 그거." 혜원은 그제야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꺼냈다. 손님이라는 것, 집안 여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져온 체질, 그리고 소이가 유난히 어릴 때부터 그것을 자주 겪고 있다는 것.
준영은 묵묵히 들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어제 밤 자신이 느꼈던 그 낯선 기운을 떠올리면,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럼 나는 뭘 어떻게 해야 돼?" 준영이 물었다.
혜원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냥… 곁에 있어주면 되지 않을까. 소이가 무섭거나 혼란스러워할 때, 잡아줄 수 있게." 준영은 그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딸에게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 조금은 두려웠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 때문에 딸을 멀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준영은 소이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아이가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지을 때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넘겼을 텐데, 이제는 조금 더 유심히 살폈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곁에 있어주려 애썼다. 어느 밤, 준영은 잠든 소이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누가 왔었니." 대답은 없었다. 그런데 준영은 그렇게 묻는 것만으로도, 딸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함께 있을 수는 있었다.
6장 그 후로 몇 달간, 신기하게도 손님이 뚝 끊겼다. 혜원은 매일 밤 소이의 숨소리를 살폈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평범한 아기의 잠, 평범한 옹알이, 평범한 하루하루였다.
처음엔 안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혜원은 이상하게 불안해졌다. "왜 안 오지." 어느 밤, 혜원은 수첩을 펼쳐놓고 혼잣말을 했다.
준영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의아했다. "손님 안 오는 게 좋은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혜원은 말끝을 흐렸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었다.
손님이 오는 게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오지 않으니 오히려 뭔가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혜원은 친정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요즘 손님이 안 와." "몇 달 됐다며.
그럴 수도 있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원래 그래. 왔다가, 한참 안 오다가.
정해진 리듬은 없어." "근데 이상하게 불안해." "불안해할 거 없어." 어머니가 말했다. "손님은 그냥 오는 거야. 소이가 뭘 잘못해서 안 오는 것도 아니고, 네가 뭘 잘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혜원은 순간 조금 안심이 됐지만, 완전히 불안이 가시지는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소이가 손님을 받지 못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했다. 처음엔 이 체질이 짐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상실감이 들었다. 그 계절 동안, 혜원은 소이와 유난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손님이 아니라, 그냥 온전히 소이 자신의 하루하루를 지켜봤다. 처음 뒤집기를 하고, 처음 이가 나고, 처음 "엄마"라는 말을 뱉는 순간들. 혜원은 그 평범한 성장의 기록들을 수첩 뒷장에 채워나갔다.
"오늘은 손님 없음. 대신 소이가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다. 이것도 기록해둔다." 그렇게 적고 나니, 혜원은 문득 깨달았다.
이 수첩이 꼭 손님만을 위한 것일 필요는 없었다. 소이의 삶 전체를, 손님이 있든 없든, 담아두면 되는 거였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혜원의 마음도 서서히 편안해졌다.
손님이 없는 계절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간이, 소이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7장 늦가을의 어느 밤, 소이는 유난히 뒤척이며 잠들었다. 혜원은 그 낯익은 신호를 곧바로 알아챘다. 낮고 일정한 숨소리,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몇 달 만에 돌아온 손님이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다. 창가에 앉아 한참을 밖을 바라봤다.
단풍이 지기 시작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허공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마치 떨어지는 낙엽을 만지려는 것처럼. 혜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 손님, 전에도 온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수첩을 뒤져보니, 정말로 비슷한 기록이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소이가 창문 쪽을 바라보며 손을 뻗던 그날.
"뭔가를 열던 사람이었을까"라고 적어뒀던 그 기록이었다. "같은 손님이야." 혜원은 그날 밤늦게 준영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아?" "같은 몸짓을 반복해.
창문, 혹은 뭔가 열리는 것에 대한 몸짓." 준영은 그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이 여러 번 온다는 게 가능한 거야?" "모르겠어. 근데 이번이 확실히 두 번째야." 혜원은 그날 밤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같은 손님이 반복해서 오는 걸까. 다른 손님들은 대개 한 번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는데, 이 손님만은 뭔가 달랐다. 얼마 뒤, 세 번째 방문이 있었다.
이번엔 좀 더 선명한 단서가 남았다. 소이는 그날 아침, 처음으로 짧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기다려." 혜원은 그 말을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 완전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아이가, 그렇게 또렷하게 감정이 담긴 말을 뱉은 건 처음이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거야?"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작게 중얼거렸다. "기다려." 혜원은 그 밤, 수첩에 오래도록 이 손님에 대해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이 손님은 다르다. 뭔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소이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창밖으로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혜원은 그 낙엽을 바라보며, 이 반복되는 손님의 정체가 언젠가 밝혀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8장 세 살이 되면서, 소이는 제법 많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문장도 곧잘 만들었고, 자기 감정도 조금씩 표현할 줄 알았다. 혜원은 그 무렵부터, 아주 조심스럽게 손님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소이야, 어젯밤에 꿈 꿨어?" 소이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정도로만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소이는 처음으로 조금 더 긴 대답을 했다. "손님 왔었어." 혜원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이 스스로 그 단어를 쓴 건 처음이었다.
"손님이 뭔지 알아?"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몰라.
근데 할머니가 그렇게 불렀어." 혜원은 그 말에 놀랐다. "할머니가? 어느 할머니?" "꿈에 나온 할머니." 소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자기를 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어." 혜원은 그 대답에 소름이 돋았다. 손님 스스로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는 뜻이었다. 이건 혜원이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 집안 사람들이 붙인 이름인 줄만 알았는데, 어쩌면 손님들 쪽에서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 할머니, 어떤 사람이었어?" 소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콩나물 좋아하는 할머니." 혜원은 그 얘기를 듣자 눈물이 핑 돌았다.
증조할머니였다. 혜원 자신도 태몽에서 만났던 바로 그 손님. 소이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왔던 그 손님을 다시 만난 거였다.
"그 할머니가 또 왔어?" "응, 가끔." 소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근데 이제 안 와. 전해줬대." "뭘 전해줬대?" 소이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른 놀이로 관심을 돌렸다. 세 살짜리 아이의 집중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혜원은 그 밤, 수첩에 이 대화를 자세히 옮겨 적었다.
손님들이 스스로 이름을 밝힌다는 것, 그리고 어떤 손님은 "다 전해줬다"며 떠난다는 것. 처음으로, 혜원은 이 현상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려움도 조금 자랐다. 소이가 이제 스스로 그것들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건, 앞으로 더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9장 외할머니가 처음으로 소이를 오래 만난 건, 그해 겨울이었다.
혜원의 어머니, 그러니까 소이의 외할머니는 명절을 맞아 며칠 머물기로 했다. 도착한 첫날 저녁, 할머니는 소이와 마주 앉아 한참을 가만히 바라봤다. 소이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이 아이, 눈빛이 다르네."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가 달라요?" 혜원이 물었다. "손님을 많이 만난 눈이야."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소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너보다 훨씬 많이 만났겠다." 밤이 깊어지자, 할머니는 소이의 방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혜원은 조금 걱정이 됐지만, 할머니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오히려 잘 알아. 이런 밤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혜원은 그 얼굴을 보고 뭔가 있었다는 걸 직감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아이 옆에 있으니까, 나도 오랜만에 뭔가 스치는 게 있더라." "손님이 왔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할머니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냥, 그 아이가 자면서 내는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
우리 이모할머니 생각도 나고." "이모할머니요?" 할머니는 그 이름을 듣고 잠깐 멈칫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이모, 그러니까 네 증조할머니의 동생. 젊었을 때 남편이 먼 곳으로 떠났는데, 다시 안 돌아왔어.
그 사람이 돌아오길, 평생을 창가에 앉아서 기다렸다더라. 늙어 죽을 때까지."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창문, 기다림, 열리는 것을 바라던 몸짓.
그동안 소이가 반복해서 만난 손님의 흔적들이, 이 이야기와 정확히 겹쳐졌다. "엄마, 그 이모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순임이었지, 아마. 워낙 오래전 일이라 나도 얼굴은 기억 안 나." 할머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이 옆에 있으니까 그 이름이 자꾸 떠오르더라." 혜원은 그날 늦은 밤, 수첩에 처음으로 손님의 이름을 적었다. "순임 할머니. 창가에서 평생 기다림.
소이에게 반복해서 찾아오는 손님과 일치하는 것 같다." 이름이 생기자, 그 존재는 더 이상 막연한 흔적이 아니었다. 혜원은 처음으로, 손님도 한때 이 세상을 살아낸 한 사람이었다는 걸 실감했다. 10장 동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소이는 또래 아이들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낮잠 시간마다 유독 다른 숨소리로 잠드는 아이. 가끔 알 수 없는 옛날 말투를 쓰거나, 배운 적 없는 몸짓을 하는 아이.
선생님들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자 조금씩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소이 어머니, 저기." 어느 날 하원 시간, 담임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혜원을 붙잡았다. "소이가 가끔 좀 특이한 말을 해서요." "어떤 말이요?" "오늘은 낮잠 자다
일어나서, 갑자기 '문 좀 열어줘요'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옛날 말투로요. 그리고 한참을 창밖만 보고 있었어요." 혜원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 요즘 그런 놀이를 좋아해서요. 옛날 사람 흉내 내기." 선생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지 않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혜원은 어린이집을 나서며, 이제 이 문제가 가족 안에서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놀이터에서 다른 학부모들 사이의 대화가 혜원의 귀에 들어왔다. "그 집 애 좀 이상하지 않아? 가끔 혼잣말하는 것도 그렇고." "낮잠 잘 때 이상한 소리 낸다며.
담임 선생님이 그러던데." 혜원은 그 대화를 못 들은 척 지나쳤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이상한 아이로 비칠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집에 돌아와서, 혜원은 준영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혜원이 물었다. "숨겨야 하나, 그냥 뒀다가 소이가 더 힘들어지면 어떡하지." 준영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숨기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게 소이한테 좋은 걸까.
자기가 이상한 존재라고 느끼게 만드는 거잖아." 혜원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동시에, 세상이 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 무렵의 어느 밤, 혜원은 잠든 소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오해와 시선을 견뎌야 할까. 손님이라는 존재 자체보다, 오히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큰 짐이 될지도 몰랐다. 혜원은 소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이 손이 앞으로 겪을 모든 순간들을, 자신이 다 막아줄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1장 순임 할머니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결심한 건, 혜원 자신이었다. 외할머니에게 연락해 옛 사진첩이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오래된 사진 몇 장이 남아 있었다. 혜원은 주말에 친정에 들러, 그 낡은 사진첩을 함께 넘겨봤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젊은 여자가 한복을 입고 서 있었다.
표정은 흐릿했지만, 창가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자세만은 선명했다. "이게 순임 할머니예요?" "그런 것 같다. 정확히는 나도 몰라, 사진에 이름이 안 적혀 있어서." 외할머니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근데 이 느낌, 맞는 것 같아." 혜원은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소이에게 보여줬다. 소이는 사진을 보자마자, 별다른 설명 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할머니야." 혜원은 그 순간 확신했다.
소이가 계속 만나온 손님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이 할머니가 뭘 원하는지 알아?"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는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누구 기다려. 근데 이제 안 와도 되는데, 계속 기다려." 혜원은 그 대답에 마음이 저릿했다. 순임 할머니의 남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평생 창가에서 기다렸다는 그 이야기. 죽어서도 그 기다림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까. "그럼 우리가 뭘 해줄 수 있을까." 혜원이 물었다.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몰라. 근데 계속 슬퍼 보여." 혜원은 잠자리에 든 그날 밤,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손님이 단순히 기억을 남기고 가는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뭔가 풀리지 않은 감정을 안고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소이가 그 감정을 계속 짊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혜원은 문득 두려워졌다.
이 어린아이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무게가 너무 크지는 않을까. 다음 날, 혜원은 소이를 데리고 오래된 사진 속 창가와 비슷한 곳을 찾아 나섰다.
순임 할머니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동네였다. 지금은 재개발로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혜원은 그 근처에서 소이와 함께 잠시 걸었다. 소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혜원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 여정 자체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12장 그날 이후로, 순임 할머니의 방문은 더 잦아졌다. 거의 매일 밤, 소이는 낮고 일정한 숨소리로 잠들었다. 아침마다
창가를 바라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혜원은 처음엔 이 반복이 뭔가 진전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보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느 밤, 소이는 잠자리에 들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안 잘래." 소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왜, 무서운 꿈 꿨어?" 혜원이 물었다.
소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머니가 계속 슬퍼해. 나도 슬퍼져." 혜원은 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했다.
손님의 감정이 소이 자신의 감정과 뒤섞이기 시작한 거였다. 예전에는 그냥 몸짓이나 단어로 흔적이 남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 감정 자체가 아이에게 전이되고 있었다. "자지 않으면 안 만나도 돼?"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몰라." 소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근데 안 자면 할머니 혼자 있어야 하잖아." 혜원은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세 살짜리 아이가, 자신의 두려움보다
손님의 외로움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그날 밤늦게, 혜원은 소이를 품에 안고 오랫동안 다독였다. "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을게.
자도 돼." 소이는 한참을 울다가, 결국 지쳐 잠들었다. 그날 밤도 순임 할머니는 찾아왔다. 혜원은 밤새 딸의 곁을 지켰다.
낮고 일정한 숨소리를 들으며, 혜원은 딸이 감당하고 있는 무게를 조금이나마 함께 나누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평소보다 지친 얼굴로 깨어났다.
혜원은 그 얼굴을 보며 결심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순임 할머니의 기다림을 끝내줄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혜원은 다시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순임 할머니 이야기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거 없어요? 그 남편분에 대해서라도." 외할머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집안 어른들한테 들은 얘기가 하나 있긴 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뭔데요?" "그 남편이라는 사람, 사실 죽은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새 가정을 꾸렸다는 얘기가 있었어. 확인된 건 아니고, 그냥 소문이었지만." 혜원은 순간 숨이 막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순임 할머니는 평생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살다 간 셈이었다. 13장 그 밤, 혜원은 잠자리에 든 소이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소이야, 오늘 밤에 할머니 만나면,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전해줄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혜원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 사람은, 할머니가 기다리던 사람은, 다른 곳에서 잘 지내고 있었대. 그러니까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할머니 잘못이 아니었다고." 소이는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그렇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전해볼게." 혜원은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밤이 깊어지자, 잠들지 못하고 거실에 앉아 오래도록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눈을 떴다. 슬프지도, 지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뭔가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땠어?"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살짜리 아이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혜원은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꿈속에서, 소이는 여느 때처럼 창가에 앉은 할머니 곁에 있었다. 할머니는 늘 그렇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이는 그 옆에 다가가, 배운 대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 그 사람 잘 지내고 있대요. 다른 데서. 그러니까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할머니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처음으로 소이 쪽을 돌아봤다. 얼굴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그 표정에서 뭔가 놓아지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랬구나." 할머니가 낮게 말했다. "그럼 됐다." 그게 다였다. 대단한 감정의 폭발도, 눈물도 없었다.
그냥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뭔가를, 아주 조용히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고맙다, 아가야."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서서히, 그 모습이 빛 속으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소이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뭔가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
세 살짜리 딸이,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평생에 걸친 슬픔을 끝내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이 아이가 앞으로 이런 무게를 계속 짊어지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소이야, 힘들지 않았어?" 소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할머니 도와준 거잖아." 그 대답이, 혜원의 마음을 다시 한번 흔들었다. 이 아이는 무게를 짐이 아니라, 도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순임 할머니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혜원은 수첩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적었다. "순임 할머니, 떠남.
소이가 도와줌. 이것이 손님이라는 것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짐이 아니라,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러 오는 것일지도." 14장 순임 할머니를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되어, 혜원은 문득 그분의 흔적을 좀 더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그 옛날 동네 말이에요." 혜원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순임 할머니가 사시던 곳,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아볼 방법이 있을까요?" 외할머니는 한참을 기억을 더듬다가, 오래된 주소 하나를 알려줬다. 지금은 동 이름도 바뀌고 재개발로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지만, 혜원은 어쩐지 그곳을 직접 가보고 싶었다.
주말, 혜원은 소이를 데리고 그 옛 동네를 찾아갔다. 예상대로 낡은 한옥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혜원은 단지 안내판 앞에 서서, 오래전 이곳에 있었을 좁은 골목과 낮은 담장을 상상해봤다.
"여기가 그 할머니 집이었어?" 소이가 물었다. "아마 근처였을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어." 두 사람은 단지 안 벤치에 잠시 앉았다.
소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혜원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곳에 오는 게 의미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근처를 지나던 나이 든 경비원이 두 사람을 유심히 보다가 다가왔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혜원은 얼떨결에 사정을 설명했다. 옛날 이 동네에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먼 친척 어른의 흔적을 찾고 있다고. 순임이라는 이름과, 대략의 시대를 말했다.
경비원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순임이라... 어렴풋이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네요.
저희 어머니가 이 동네 토박이셨는데, 옛날얘기를 자주 하셨거든요. 창가에 늘 앉아 있던 여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혜원은 그 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혹시 더 자세히 아시는 거 있으세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평생 누군가를 기다리다 돌아가셨다는 얘기 정도. 동네에서 그런 얘기가 전설처럼 돌았대요." 경비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다 사라진 이야기죠." 혜원은 그 자리에서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그 짧은 확인이, 순임 할머니가 실제로 존재했던 한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감사합니다." 혜원은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조금 더 알게 됐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혜원은 소이에게 물었다. "여기 와보니까 어때?"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왠지 할머니가 좋아할 것 같아. 우리가 여기 온 거." 혜원은 그 말에 미소 지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 말이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5장 가을이 시작될 무렵, 소이는 유치원에서 그림일기 쓰는 법을 배워왔다. 매일 밤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을 간단한 그림과 몇 마디 말로 남기는 숙제였다. 혜원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자신의 수첩을 떠올렸다.
엄마가 아이를 위해 남기던 기록을, 이제는 아이 스스로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은 뭐 그렸어?" 혜원이 물었다. 소이는 삐뚤빼뚤한 그림을 보여줬다.
창문과, 그 앞에 앉은 사람 하나. "이거 순임 할머니야." 소이가 설명했다. "오늘 생각나서 그렸어." 혜원은 그 그림을 한참 들여다봤다.
손님이 떠난 뒤에도, 소이는 그 존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소이의 그림일기에는 종종 손님들의 흔적이 담겼다. 실제로 꿈을 꾼 날이 아니어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그림으로 남기곤 했다.
혜원은 그 그림일기를 소이 몰래 사진으로 찍어두기 시작했다. 언젠가 딸이 자라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짊어지고 살아왔는지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어느 날 밤, 혜원은 소이의 그림일기 사이에서 낯선 장면을 발견했다.
바다를 그린 그림이었다. 순임 할머니와도, 지금까지 만난 어떤 손님과도 관련 없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이건 무슨 그림이야?" 혜원이 물었다.
소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 그냥 그리고 싶었어.
근데 이상하게 낯익어." 혜원은 그 말을 듣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아직 오지 않은 손님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언제나 과거에서만 오는 건 아닐 수도 있었다.
혜원은 그 그림을 조심스럽게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바다
그림. 아직 정체를 알 수 없음. 예감이 있다면, 이것이 다음 손님의 첫 흔적일지도." 16장 늦가을의 어느 저녁, 준영은 오랜만에 소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됐다.
혜원이 외할머니 병문안을 다녀오는 동안, 준영은 소이를 데리고 동네 공원을 산책했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구경했다. "아빠." 소이가 문득 불렀다.
"아빠는 손님 만난 적 없어?" 준영은 그 질문에 잠깐 놀랐다. "아빠는 그런 능력 없어. 엄마랑 너만 있는 거야." "그럼 아빠는 안 무서워?
나랑 있으면." 준영은 딸의 그 질문에 마음이 아려왔다. "무섭지 않아. 오히려 신기하고, 대견해." "근데 가끔 힘들어." 소이가 작게 말했다.
"다른 사람 슬픔을 계속 느끼는 거." 준영은 딸을 품에 안았다. "그럴 때는 아빠한테 말해. 아빠가 다
이해는 못 해도, 옆에 있어줄 수는 있어." 소이는 그 품 안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빠는 어떻게 엄마랑 결혼했어?" 소이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준영은 웃으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줬다.
혜원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집안의 비밀을 전혀 모른 채 그저 조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놀랐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더 좋아졌어." 준영이 말했다.
"엄마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게 됐으니까." 소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그날 저녁, 부녀는 오랫동안 공원에 머물렀다. 손님도, 낯선 기억도 없이, 그저 아버지와 딸로서 함께 보내는 평범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이는 준영의 손을 꼭 잡았다. "아빠, 오늘 재밌었어." "아빠도." 준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17장 초겨울, 혜원은 문득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됐다.
소이가 태어난 지 이제 곧 사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몇 명의 손님이 다녀갔는지, 혜원은 수첩을 펼쳐 세어봤다. 정확한 숫자는 세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대여섯 번은 되는 것 같았다.
"소이야, 요즘도 손님 자주 와?" 혜원이 물었다. "가끔." 소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근데 요즘은 무섭지 않아." "왜?" "엄마 아빠가 있으니까." 소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혜원은 그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처음 이 체질을 알게 됐을 때의 두려움과 혼란이, 이제는 가족 모두가 함께 짊어지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 가족은 오랜만에 다
함께 외할머니 집을 방문했다. 외할머니는 소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많이 컸구나.
그리고 많이 단단해졌어." "할머니도 옛날에 손님 많이 만났어요?" 소이가 물었다. "나는 너만큼은 아니었어. 근데 몇 명 만났지.
그 사람들 덕분에,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소이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늦은 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혜원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이 평화로운 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물론 다음 손님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불확실함조차 가족이 함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어 있었다.
18장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겨울이 깊어갔다. 순임 할머니를 떠나보낸 뒤로, 소이의 밤은 대체로 평온했다. 아주 가끔 작은 손님이 스치듯 다녀갔지만, 예전처럼 크게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이듬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혜원은 소이를 데리고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갔다. 근처 계곡이었다. 소이는 물놀이를 하며 신나게 웃었다.
손님도, 낯선 기억도 없는, 온전히 네 살짜리 아이의 웃음이었다. 혜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지난 일 년을 돌아봤다. 두렵고 혼란스러웠던 밤들, 순임 할머니와의 만남과 이별, 옛 동네를 찾아갔던 오후, 그림일기 속에 쌓여간 기억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함께 나눴던 저녁까지.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혜원은 이 아이가 단순히 특별한 체질을 가진 게 아니라, 뭔가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준영도 이제는 완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계곡 물가에서 소이와 물장난을 치며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혜원은 마음이 놓였다.
혼자 짊어졌던 무게가, 이제는 셋이 나눠 가진 것 같았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소이는 지쳐 잠들었다. 혜원은 백미러로 잠든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 무렵의 어느 밤, 혜원은 오랜만에 수첩을 펼쳐 새로운 페이지를 시작했다. "소이, 네 살 여름.
지난 일 년, 여러 손님을 만나고 떠나보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더 올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는 두렵지만은 않다.
이 아이는, 그들을 짐이 아니라 도움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혜원은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여름밤 특유의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서, 혜원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이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일 것이다. 자기 자신의 계절과, 낯선 이들의 계절이 겹쳐지는 삶. 그것이 짐일지, 선물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적어도 이번 여름, 딸은 그것을 선물처럼 받아들였다. 창가에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순임 할머니를 떠올리며 혜원이 지난여름 새로 심은 것이었다.
이제는 제법 자라, 작은 잎사귀들을 무성하게 틔우고 있었다. 소이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2권
여름의 이름 1장 유치원 입학식 날, 소이는 낯선 아이들 틈에서 유독 조용히 서 있었다.
혜원은 교실 뒤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른 아이들은 울거나 부모 옷깃을 붙잡고 떼를 썼는데, 소이는 담담하게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낯가림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미 너무 많은 낯선 존재를 만나봐서 새로운 사람 앞에서 크게 동요하지 않는 건지, 혜원은 알 수 없었다.
"소이야, 여기 앉아볼까?" 선생님이 이름표가 붙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이는 순순히 그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저 옆자리, 원래 다른 친구가 앉기로 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혜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사정이 있어서 못 오게 됐어요." 혜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서야, 혜원은 그 사정을 알게 됐다. 같은 반이었어야 할 아이, 유준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학부모 모임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집, 아직도 힘들어한대. 하나뿐인 아들이었잖아."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그날 밤, 예감은 현실이 됐다. 소이는 평소와 다른 숨소리로 잠들었다. 낮고, 조금 불규칙한 리듬.
혜원은 그 변화를 곧바로 알아챘다. 새로운 손님이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평소와 다른 몸짓을 보였다.
장난감 자동차를 손에 쥐고 바닥에 대고 빠르게 밀며, "부릉부릉" 하는 의성어까지 곁들였다. 얼굴 가득 신나는 표정이었다. 혜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유준이라는 아이가 사고를 당한 게, 자동차와 관련된 일이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소이야, 그거 재밌어?"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친구가 알려줬어." 소이가 해맑게 대답했다. "어떤 친구?" "몰라. 근데 되게 신나 하는 친구야." 소이는 계속 장난감을 밀며 놀았다.
"빠르게 달리는 거 좋아해." 혜원은 그 대답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소이는 아직 이 손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신나게 놀던 기억만을 이어받아, 똑같이 신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혜원은 그 밤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손님. 또래 아이인 것 같다.
자동차 놀이. 밝고 신난 기색.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유준이라는 아이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번 손님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가진 존재였다. 어른의 오래된 슬픔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됐어야 할 한 아이의 삶이 갑자기 멈춰버린 흔적이었다. 2장 새로운 손님과는 별개로, 소이는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진짜 친구를 사귀었다.
이름은 다은이었다. 같은 반에서 자리가 붙어 있던 아이였는데,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소이는 집에 돌아오면 매일 다은이 얘기를 했다.
다은이가 그린 그림, 다은이가 좋아하는 간식, 다은이와 함께 만든 모래성. 혜원은 그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손님이라는 무거운 존재와는 별개로, 딸에게 또래의 평범한 우정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다은이 어머니가 하원 길에 혜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저기, 소이 어머니. 죄송한데 여쭤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다은이가 그러는데, 소이가 가끔 이상한 얘기를 한대요.
자기가 아는 친구인데 아무도 못 보는 친구가 있다고." 혜원은 순간 긴장했다. "아, 그게…" "이상하게 생각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요." 다은이 어머니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냥, 다은이가 궁금해해서요.
상상 속 친구 같은 건가 싶어서." 혜원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네, 비슷한 거예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라." 다은이 어머니는 그 대답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혜원은 그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그날 저녁, 혜원은 소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은이한테 손님 얘기했어?" "어, 조금." 소이가 대답했다. "근데 다은이는 재밌어했어. 무서워하지 않았어." "다행이다." 혜원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조금 조심해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다들 다은이처럼 이해해주지는 않을 수도 있거든." 소이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왜?
나쁜 거 아니잖아." "나쁜 게 아니야." 혜원이 힘주어 말했다. "그냥, 세상에는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어." 소이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없이 동의했다. 그날 이후로, 소이는 다은이 외에는 손님 얘기를 잘 꺼내지 않게 됐다.
혜원은 그 모습을 보며 안도하면서도, 딸이 벌써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서글퍼졌다. 3장 혜원은 조심스럽게, 유준이라는 아이에 대해 더 알아보기 시작했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다른 학부모를 통해, 조금씩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준은 봄에 아버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자세한 정황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그 집 부모는 여전히 아이 얘기를 입에 담지 못한다는 것만 전해졌다.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소이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살 아이에게, 손님이 이미 세상을 떠난 또래 친구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날 저녁, 혜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야, 그 친구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몰라. 근데 항상 신나 있어." 소이가 대답했다. "같이 놀자고 해." "어떻게 놀아?" "차 타고 달리는 거.
창문 열고 바람 맞는 거." 소이는 그 말을 하며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 시늉을 했다. "되게 좋아해, 그거." 혜원은 그 몸짓을 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느꼈을 감각이, 어쩌면 이 순간의 즐거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나 고통이 아니라, 그저 신나게 달리던 순간. 며칠 뒤, 소이는 어린이집에서 그림을 하나 그려왔다. 자동차와, 그 옆에 웃고 있는 작은 사람 두 명.
선생님은 그 그림을 보고 흐뭇해하며 말했다. "소이가 친구 사귀는 그림을 그렸나 봐요." 혜원은 그 그림을 받아들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어넘겼다. 집에 돌아와, 혜원은 그림 속 두 사람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하나는 분명 소이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이가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 없는 아이였다. 혜원은 그 그림을 수첩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유준이로 추정되는 손님. 지속적으로 방문 중. 소이는 아직 이 아이가 세상에 없다는 걸 모른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텐데, 그 시점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밤이 깊어지자, 혜원은 준영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혜원이 물었다. "소이한테 사실대로 말해줘야 할까, 아니면 그냥 두어야 할까." 준영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만약 소이가 계속 이 친구를 만나야 한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근데 지금은, 그냥 즐거운 놀이 상대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혜원은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런데 동시에, 이 평온함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유준의 부모가 여전히 아이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언젠가 이 손님도 뭔가를 전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소이도 진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4장 같은 시각, 은주의 하루는 여전히 봄에 멈춰 있었다.
유준이 떠난 지 반년이 넘었지만, 은주는 여전히 그 애 방문을 열지 못했다. 문 앞을 지날 때마다 걸음이 느려졌지만, 손잡이를 잡지는 못했다.
남편 상훈은 아예 그쪽 복도를 피해 다녔다. 은주는 매일 아침, 유준이 다녔을 유치원 앞을 일부러 지나쳐 출근했다. 이유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냥, 그 길을 지나지 않으면 뭔가 잊어버리는 것 같은 불안이 있었다. 직장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다. 동료들도 조심스럽게 그 얘기를 피했다.
다들 배려한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은주에게는 그 침묵이 오히려 아이가 없었던 존재처럼 지워지는 것 같아 힘들었다. 퇴근길, 은주는 종종 아이 옷가게 앞을 서성였다. 사지도 않으면서, 진열된 작은 옷들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유준이 좋아했을 법한 색깔, 유준이 입었을 법한 사이즈. 그런 것들을 눈으로 좇는 게, 은주가 아이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상훈과 은주는 서로 말을 아꼈다.
둘 다 같은 슬픔을 안고 있었지만, 그 슬픔을 나누는 방법을 몰랐다. 상훈은 점점 말수가 줄었고, 은주는 점점 혼자 우는 밤이 늘었다.
그해 여름, 은주는 우연히 유준이 다녔어야 할 유치원의 학예회 소식을 들었다. 원래 유준의 반이 될 예정이었던 아이들이 무대에 서는 날이었다. 은주는 며칠을 망설이다가, 결국 그 자리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왜 거길 가려고 해." 상훈이 만류했다. "모르겠어. 그냥, 가봐야 할 것 같아." 은주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학예회 날, 은주는 관람석 구석에 조용히 앉았다. 무대 위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유준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그 자리에서, 은주는 소이 어머니와 처음 마주쳤다.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거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벌어질 일들을, 은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5장 여름이 깊어갈 무렵, 소이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물었다. 계기는 뜻밖이었다. 집 앞 화단에서 죽은 나비를 발견한 날이었다.
소이는 그 나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엄마, 얘 왜 안 움직여?" "죽었으니까." 혜원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죽었다는 게 뭐야?" 혜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였다.
"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거야. 움직이지도, 먹지도, 놀지도 못하는 거." "그럼 다시 안 움직여?" "응, 다시는 안 움직여." 소이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물었다. "그럼 내 친구도 죽은 거야?" 혜원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무슨 친구?" "차 타는 거 좋아하는 친구." 소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 계속 안 움직이는 얘기만 해." 혜원은 그 대답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몰라.
근데 최근에 꿈에서, 그 친구가 이상하게 조용했어. 평소엔 되게 신났는데." 혜원은 그 순간, 손님의 변화를 직감했다. 처음엔 밝고 신난 기억만 반복되던 손님이, 이제는 조금씩 다른 감정을 내비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소이야, 그 친구 이름 혹시 알아?" 소이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근데 물어봐도 될까?" "물어봐도 돼.
근데 천천히 물어봐, 알겠지?" 그날 늦은 밤, 소이는 다시 손님을 만났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조금 다른 얼굴로 깨어났다. 여전히 밝았지만, 어딘가 신중해진 표정이었다.
"이름 알아냈어?" 혜원이 물었다. "응. 유준이래." 소이가 대답했다.
혜원은 그 이름을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제 못 움직인다고 했어. 근데 괜찮대." "괜찮대?" "응. 근데 엄마 아빠가 슬퍼하는 게 마음에 걸린대." 소이는 그렇게 말하고, 문득 혜원을 올려다봤다.
"우리 엄마 아빠한테 가서 말해줄 수 있을까?" 혜원은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이건 순임 할머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무게의 일이었다. 그때는 오래전에 죽은 낯선 이의 이야기였지만, 이번엔 여전히 살아있는, 여전히 슬픔에 잠긴 실제 부모가 있었다.
6장 그 무렵의 어느 밤, 혜원은 준영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 우리가 그 부모님을 찾아가서, 소이가 아이의 기억을 만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혜원이 물었다. "믿어줄까?" 준영이 되물었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애가 당신 아이 꿈을 꾼다고 하면. 나 같아도 믿기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겠지." 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소이가 저렇게 원하는데, 그냥 무시할 수도 없잖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
혜원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엄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님의 가족이 아직 살아있는 경우요." 외할머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나도 그런 경우는 겪어본 적 없어. 근데, 서두르지는 마. 이런 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
잘못하면 오히려 그 가족한테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어." "어떻게 조심해야 할까요?" "직접 말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법을 찾아봐. 소이가 뭘 전하고 싶어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 다음에, 그게 정말 필요한 건지 먼저 판단해야지." 혜원은 그 조언을 마음에 새겼다. 다음 날부터, 혜원은 소이와 좀 더 깊이 대화를 나누며, 유준이 정확히 무엇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소이야, 유준이가 정확히 뭘 전해달라고 했어?" 소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자기는 괜찮다고." "그게 다야?" "음… 그리고, 자동차 타는 거 무서워하지 말라고." 소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아빠가 요즘 운전 안 한대. 유준이가 그거 걱정해." 혜원은 그 한마디에 마음이 아려왔다. 아이가 죽은 뒤, 아버지가 죄책감에 운전대를 놓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리고 죽은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혜원은 잠자리에 든 그날 밤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유준의 메시지: 부모님이 슬퍼하지 않기를,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운전할 수 있기를.
이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전해야 한다는 확신은 든다." 7장 메시지를 전할 방법을 찾기까지, 혜원은 몇 주를 더 망설였다. 무작정 유준의 부모를 찾아가는 게 맞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죽은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오히려 상처를 헤집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혜원은 답을 찾기 위해, 근처 상담센터에 익명으로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아동 사별을 겪은 가족에게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보통은 그 가족이 먼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원칙이에요." 상담사가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접근은 오히려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거든요." 혜원은 그 말을 듣고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소이는 매일 밤 유준을 만나고 있었고, 그 메시지의 무게는 점점 소이 자신에게도 부담이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 언제 전해줄 수 있어?" 소이가 물었다. "곧, 방법을 찾으면." 혜원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혜원은 결심을 굳혔다. 무작정 찾아가지는 않되, 자연스러운 계기가 생기면 그때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기로. 억지로 만들지 않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기로.
그 결심을 하고 얼마 뒤, 유치원에서 여름 학예회 소식이 전해졌다. 혜원은 그 소식을 듣고,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뭔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학예회 전날 밤, 혜원은 소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일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는데, 혹시 거기서 유준이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얘기해볼까 해." 소이는 그 말을 듣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나도 준비할게." "뭘 준비해?" "유준이한테 물어볼게. 오늘 밤에. 엄마 아빠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혜원은 딸의 그 다짐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 무거운 역할을 스스로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8장 기회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유치원에서 여름 학예회가 열리던 날, 혜원은 관람석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봤다.
조용히 앉아, 무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였다. 다른 부모들처럼 카메라를 들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혜원은 직감적으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유준의 어머니였다. 아마 아들이 다녔어야 할 유치원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 같았다.
학예회가 끝나고, 혜원은 조심스럽게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실례지만…" 혜원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저 소이 엄마예요." 여자는 조금 놀란 얼굴로 혜원을 바라봤다.
"아, 네…" "혹시, 유준이 어머님이세요?" 여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어떻게 아세요?" 혜원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깐 침묵했다. 준비했던 말들이 모두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저희 딸이, 소이가… 요즘 자꾸 유준이 얘기를 해서요." 혜원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꿈에서 만난다고."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믿기 어려우실 거예요.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혜원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저희 집안에 원래 그런 게 있어요. 꿈에서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는 거요.
그리고 얼마 전부터, 소이가 유준이를 만나고 있어요."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혜원은 여자가 화를 낼지, 아니면 자리를 떠날지 알 수 없었다. "거짓말 같은 얘기네요." 여자가 낮게 말했다.
"그렇게 느끼실 거예요." 혜원은 동의하듯 고개를 숙였다. "억지로 믿어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그런데 혹시… 유준이가 자동차 타는 걸 좋아했나요?
창문 열고 바람 맞는 거." 여자의 눈이 커졌다. 어디선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잠깐 크게 들렸다. "그건… 어떻게 아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이가 그렇게 놀아요. 유준이한테 배웠다고 하면서." 여자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혜원은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9장 여자의 이름은 은주였다. 혜원은 은주와 근처 벤치에 앉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은주는 눈물을 닦으며,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은주가 말했다. "근데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려요." "이해해요. 저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소이라는 아이가, 정말 유준이를 만나는 거예요?" "네.
저희 집안 여자들한테 대대로 있는 일이에요. 왜 그런지는 저희도 몰라요.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요." 은주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유준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혜원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괜찮다고 했대요. 그리고 엄마 아빠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은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애가 그렇게 갔는데." 혜원은 순간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은주의 슬픔은 너무 크고 깊어서, 어떤 말로도 쉽게 위로할 수 없어 보였다.
"죄송해요, 이런 얘기까지 꺼내서." 혜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부담되시면, 여기서 그만해도 돼요." 은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상하게,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요. 그 애가… 어떤 모습인지." 혜원은 그날 대화에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은주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혜원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 일이 은주에게 위로가 될지, 아니면 상처를 다시 헤집는 일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날 밤늦게, 혜원은 소이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오늘 유준이 엄마 만났어." 소이의 눈이 커졌다. "진짜?
어땠어?" "많이 슬퍼하시더라. 근데 네 얘기 듣고 싶어 하셨어." 소이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늘 밤에 유준이한테 물어볼게.
엄마 만난 거 알려줘도 되는지." 혜원은 딸의 그 배려심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죽은 친구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있었다. 10장 몇 주 뒤, 은주는 혜원과 소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는데," 은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준이 방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소이가 뭔가 더 느낄 수 있을까 해서요." 혜원은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그러기로 했다.
은주의 집에 도착해서, 세 사람은 조용히 복도를 지나 닫힌 방문 앞에 섰다. 은주는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은 사고 이후로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작은 침대, 벽에 붙은 공룡 스티커, 장난감 상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이었다. 소이는 방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둘러봤다.
그러다 장난감 상자 앞에 멈춰 서서, 그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은주는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소이는 곧 작은 장난감 자동차 하나를 꺼냈다. 파란색에, 한쪽 바퀴가 살짝 찌그러진 자동차였다. "이거." 소이가 조용히 말했다.
"이게 제일 좋아하던 거래." 은주는 그 소리에 숨을 삼켰다. "어떻게… 그걸 알아요?" "자꾸 이 색깔이 생각나서." 소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 바퀴, 찌그러진 것도 자기가 일부러 그런 거래.
실험한다고." 은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 자동차는 정말로 유준이 가장 아끼던 장난감이었고, 바퀴가 찌그러진 이유도 유준 스스로 실험 삼아 눌러본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오직 가족만 아는 사소한 사실이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은주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근데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진짜 우리 유준이가 맞다는 거." 소이는 그 자동차를 조심스럽게 다시 상자에 넣었다.
"유준이가 그러는데, 이 방 계속 이렇게 둘 필요는 없대요. 근데 엄마 아빠가 준비될 때까지는 괜찮대요." 은주는 그 말에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아이가 부모의 슬픔의 속도까지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그날 이후로, 은주는 조금씩 방문을 여는 시간이 늘었다. 아직 물건을 정리할 준비는 안 됐지만, 적어도 그 공간을 피하지는 않게 됐다. 11장 그 후로 몇 주간, 은주와 혜원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은주는 처음의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지만, 소이가 전하는 이야기들이 하나둘 맞아떨어지면서 점점 더 마음을 열었다. 소이는 유준이 좋아했던 음식, 자주 부르던 노래, 심지어 아끼던 장난감의 색깔까지 정확히 맞혔다. 은주만이 알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아요." 은주가 놀라며 물었다. "저도 몰라요. 소이가 그냥, 유준이랑 놀면서 알게 된 거래요." 어느 날, 은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남편에 대해서도 뭐라고 했나요?" 혜원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운전 안 하시는 거 걱정한다고 했어요." 은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이는 사고 이후로 한 번도 운전대를 안 잡았어요. 죄책감 때문에요. 자기가 그때 그 길로 안 갔으면, 하고 계속 자책해요." "유준이는 그게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은주는 그 얘기를 듣자 눈물을 글썽였다.
"그이한테 그 말, 전해줄 수 있을까요?" 혜원은 그 질문에 잠깐 망설였다. "남편분도 믿어주실까요?" "모르겠어요. 근데 물어는 봐야 할 것 같아요." 은주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은주는 남편 상훈을 데리고 혜원을 찾아왔다. 상훈은 처음부터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이런 거,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상훈이 딱딱하게 말했다.
"이해해요." 혜원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믿어달라고 강요하지 않을게요. 그냥, 소이가 전해달라는 이야기만 들어봐 주세요." 그날 저녁, 소이는 상훈 앞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 유준이가 그랬어요. 아빠 잘못 아니래요. 그냥 그날, 그렇게 됐던 거래요." 상훈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빠가 운전 다시 했으면 좋겠대요.
무서워하지 말고." 상훈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은주는 당황해서 남편을 따라 나갔다. 혜원은 그 뒷모습을 보며, 이 일이 오히려 상처를 더 깊게 만든 건 아닐까 걱정됐다. 12장 상훈은 집 근처 놀이터까지 걸어가, 벤치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온통 뒤엉켜 있었다. 낯선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들이,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기억을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사고가 난 날, 상훈은 평소와 다른 길로 갔었다.
공사 때문에 늘 다니던 길이 막혀서, 낯선 골목으로 우회했다. 그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사고가 났다.
상훈은 그 후로 수백 번, 수천 번 그날을 되짚었다. 그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천천히 갔더라면.
조수석에 아이를 태우지 않았더라면. 의사도, 경찰도, 심지어 은주조차 상훈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상훈 자신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운전대를 잡았던 사람은 자신이었고, 그 순간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도 자신이었다. 사고 이후, 상훈은 단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다. 회사도 대중교통으로 다녔고, 은주가 운전이 필요할 때는 늘 그녀가 대신했다.
그렇게라도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방금, 낯선 아이의 입을 통해 들은 그 말. "아빠 잘못 아니래요." 상훈은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아이를 잃은 슬픔이 아무 의미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훈은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유준이 태어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 손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꼭 쥐던 순간. 처음 걸음마를 뗐을 때 함께 손뼉 치던 순간. 차 뒷좌석에서 신나게 웃던 얼굴.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상훈은 처음으로 목 놓아 울었다. 사고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은주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애써왔는데, 그 밤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상훈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가 정말로 그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자신을 원망하지 말라고, 그저 다시 살아가라고.
상훈은 눈물을 닦고, 천천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결심이 선 얼굴이었다. 13장 그날 밤, 혜원은 마음이 무거워 잠들지 못했다.
준영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괜히 우리가 나서서, 그 가족한테 더 큰 상처를 준 건 아닐까." 준영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어떤 감정은, 터져 나와야 비로소 풀리기도 하잖아." 혜원은 그 말을 곱씹으며, 소이가 걱정되어 방으로 향했다. 소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조금 불안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무거운 얼굴로 깨어났다. "무슨 일 있었어?" 혜원이 물었다. "유준이가 슬퍼해." 소이가 말했다.
"아빠가 화낸 것 같다고." "화낸 게 아니라, 많이 힘들어서 그런 걸 거야." 소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며칠이 흐른 뒤, 은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기, 남편이… 좀 이상해요." "어떻게요?" "그날 이후로 계속 차고에 들어가 있어요. 차를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시동은 안 켜고."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상훈이 뭔가 내면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다만 그게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이 더 지나고, 은주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엔 목소리에 조금 다른 기색이 있었다. "오늘 새벽에, 남편이 차 시동을 켰어요." "정말요?" "네.
그냥 켜놓고 한참을 앉아만 있었대요. 그러다 저한테 와서, 처음으로 유준이 얘기를 꺼냈어요.
사고 나던 날 얘기를요." 혜원은 그 말에 마음이 놓였다. 상훈이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드디어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은주가 말했다.
"이게 맞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뭔가 달라지고 있어요." 14장 그 무렵, 혜원은 소이에게서 낯선 피로감을 발견했다. 늘 씩씩하던 아이가, 요즘 들어 부쩍 조용해졌다. 밥도 깨작거리고,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도 시들해졌다.
혜원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소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이야, 요즘 좀 힘들어?" 소이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혜원은 그 옆에 조용히 앉아, 딸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나… 유준이 도와주는 거 좋은데," 소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근데 가끔 무서워." "뭐가 무서워?" "유준이 엄마 아빠 슬픈 거, 나도 자꾸 같이 슬퍼져." 소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근데 그거 티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참았어." 혜원은 그 대답에 가슴이 아려왔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어른들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면서도, 그 무게를 티 내지 않으려 애써왔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참지 않아도 돼." 혜원이 딸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너도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
그게 나쁜 게 아니야." 그 밤, 준영도 소이 곁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도 어릴 때 그랬어. 친구가 아파서 그 부모님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슬펐던 적이 있었거든." "아빠도?" "응.
근데 그때 우리 아빠가 그랬어. 슬픔을 나눠 갖는 것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대신,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는 말라고." 소이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금씩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나 힘들 때마다 아빠한테 말해도 돼?" "당연하지.
언제든지." 그날 이후로, 소이는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유준을 만난 다음 날은 가끔 "오늘은 좀 힘들었어"라고 말했고, 혜원과 준영은 그때마다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무게를 없앨 수는 없었지만, 함께 나눠 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15장 한 달쯤 뒤, 은주는 혜원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저희, 이번 주말에 다
같이 짧은 드라이브를 가보려고요. 남편이 처음으로 먼저 제안했어요." 은주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가 담겨 있었다. "혹시… 소이도 같이 가줄 수 있을까요?" 혜원은 그 부탁에 잠깐 망설였다.
그런데 소이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유준이도 같이 가고 싶어 할 거야." 소이가 말했다. 주말, 두 가족은 근처 바닷가로 짧은 드라이브를 떠났다.
상훈이 운전대를 잡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지만, 그는 끝까지 운전을 놓지 않았다. 차 안에서, 소이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유준이가 좋아하는 거예요." 소이가 조용히 말했다. "창문 열고 바람 맞는 거." 상훈은 백미러로 그 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바닷가에 도착해서, 가족들은 함께 모래사장을 걸었다. 소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은주가 물었다. "유준이한테 인사하는 거예요." 소이가 대답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아요." 그 한마디에 은주와 상훈의 얼굴이 동시에 흔들렸다.
"마지막이라니." 은주가 물었다. 소이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천천히 설명했다. "유준이가 그랬어요.
이제 엄마 아빠가 괜찮아진 것 같다고. 그래서 이제 안 와도 될 것 같대요." 상훈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소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유준이한테, 아빠가 미안하다고 전해줄 수 있어?" 상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미안해하지 말래요.
그냥, 사랑한다고만 전해달래요." 상훈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울었다. 은주도 남편 곁에 앉아 함께 울었다. 소이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두 사람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바닷바람이 세 사람,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한 아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16장 몇 주 뒤, 은주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저희 요즘 많이 달라졌어요." 은주의 목소리가 한결 밝았다.
"얼마 전에, 드디어 유준이 방 정리를 시작했어요." "괜찮으셨어요?" "처음엔 힘들었죠. 근데 이상하게, 물건 하나씩 정리할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 자동차는, 차마 버리지 못해서 거실 선반에 올려뒀어요."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놓였다. "상훈 씨는요?" "운전, 다시 시작했어요. 처음엔 짧은 거리만 가더니, 이제는 저 대신 마트도 다녀오고 그래요." 은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얼마 전엔, 유준이 사진 보면서 웃더라고요. 처음이었어요, 사고 이후로." 혜원은 그 소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소이한테 정말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은주가 말했다.
"그 아이 덕분에, 저희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아요." 그날 저녁, 혜원은 소이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소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준이도 좋아할 것 같아." "넌 어때, 이제 좀 마음이 편해?"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응. 근데 가끔 유준이 생각나. 이제 안 오는데도." "보고 싶어?" "조금." 소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근데 그건 괜찮은 거지? 슬픈 거 아니고?" 혜원은 딸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건, 슬픈 게 아니라 사랑했다는 증거야." 17장 가을 문턱에 들어설 무렵, 소이는 유치원에서 조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밝고 명랑했지만, 또래보다 조금 더 깊은 눈을 가진 아이였다.
선생님들은 소이가 다른 친구들의 감정을 유독 잘 알아챈다고 말하곤 했다. 누가 속상해 보이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고, 누가 아파 보이면 옆에 가만히 앉아 있어 주었다. 혜원은 그런 딸의 변화를 지켜보며, 손님이라는 존재가 소이에게 남긴 게 단순히 무게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타인의 슬픔을 자주 마주해본 아이는, 그만큼 타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법도 함께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다은이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을 때, 소이는 제일 먼저 달려가 다은이를 다독였다. "괜찮아, 아프지?" 소이가 그렇게 말하며 다은이의 무릎을 살펴봤다.
"울어도 돼. 나도 슬프면 울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담임 선생님이, 나중에 혜원에게 조용히 말했다. "소이가 참 다정한 아이예요.
이 나이에 흔치 않게, 다른 사람 마음을 잘 헤아려요." 혜원은 그 말을 들으며 뿌듯함과 동시에 애틋함을 느꼈다. 이 아이가 겪어온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이렇게 다정함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던 어느 오후, 혜원은 소이와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소이야, 유준이랑 순임 할머니 말고, 또 다른 손님이 궁금하지 않아?"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미소 지었다. "궁금해. 근데 무섭지는 않아.
이제 알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온다는 거." 혜원은 그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더 찾아올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소이는 그것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18장 겨울이 되면서, 두 가족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가까워졌다. 은주와 상훈은 종종 혜원의 가족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처음엔 감사 인사 차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건 자연스러운 우정으로 바뀌어갔다.
아이를 잃은 부모와, 그 아이의 마지막 인사를 전해준 가족. 그 특별한 인연은, 이제 평범한 이웃 사이의 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 은주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혹시… 저희 유준이 몫으로 준비했던 선물이 있는데, 소이한테 줘도 될까요?" 혜원은 순간 망설였지만, 소이가 먼저 밝게 대답했다. "저 받고 싶어요!" 선물은 작은 그림책이었다. 유준이 좋아했을 법한, 자동차가 잔뜩 나오는 그림책.
소이는 그 책을 받아 들고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소중히 볼게요." 은주는 그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상하게, 이 선물을 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상훈은 처음으로 유준에 대한 밝은 기억들을 편하게 이야기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 첫걸음마,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설레하던 모습. 슬픔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기억들을 웃으며 나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혜원은 그 자리를 지켜보며, 손님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인연의 신비로움을 다시금 실감했다. 낯선 두 가족이 죽은 아이 하나를 매개로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이는 그림책을 꼭 안고 잠들었다.
혜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 겨울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19장 새해가 밝고, 혜원은 오랜만에 수첩의 새 페이지를 펼쳤다. 지난 일 년간의 기록들을 다시 훑어봤다.
순임 할머니로 시작해서, 유준이로 이어진 이야기들. 각기 다른 무게와 다른 결을 가진 손님들이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품고 있었다는 것.
혜원은 수첩 맨 뒷장에 이렇게 적었다. "소이, 다섯 살. 두 번째 큰 손님을 떠나보냈다.
이번엔 단순히 손님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소이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짊어지고, 무사히 건너왔다." 혜원은 잠시 펜을 멈추고, 창밖의 겨울 풍경을 바라봤다.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이 아이를 거쳐 갈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는 안다.
소이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고 손님들이 남긴 사람들이, 함께 그 길을 걸어줄 것이다." 혜원은 수첩을 덮고, 창가에 놓인 화분을 바라봤다. 순임 할머니를 기리며 심었던 그 화분은, 이제 제법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옆에, 은주가 선물로 준 작은 화분 하나가 새로 놓여 있었다. 유준을 기리는 마음으로 함께 심은 것이었다. 두 개의 화분이 나란히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며, 혜원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이의 삶은 앞으로도 이렇게, 하나씩 새로운 이야기를 심어가며 이어질 것이다. 20장 이듬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소이는 유치원에서 여느 때처럼 놀았다. 손님도 없이, 평범한 다섯 살 아이의 하루하루였다.
순임 할머니를, 그리고 유준을 떠나보낸 지도 어느새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 있었다. 혜원은 그 평온함을 보며 안도했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이 평온함도 언젠가 다시 흔들릴 거라는 걸.
어느 저녁, 소이는 문득 혜원에게 물었다. "엄마, 손님들은 다 슬픈 이야기만 가지고 와?" 혜원은 그 질문에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닐 수도 있어. 우리가 아직 슬픈 이야기만 만났을 뿐이지." "그럼 다음엔 다른 이야기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 혜원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님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오니까." 소이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여름 저녁의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소이는 다음 손님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올지, 조용히 궁금해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혜원은 오랜만에 소이의 그림일기를 몰래 펼쳐봤다. 최근 며칠간의 그림들이 담겨 있었다. 유치원 친구들과 뛰노는 모습, 가족과 함께한 저녁 식사,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작은 자동차 한 대가 그려져 있었다.
유준이 좋아하던 그 파란 자동차였다. 혜원은 그 그림 밑에 적힌 짧은 글자를 읽었다. 아직 서툰 글씨였지만, 또박또박 눌러쓴 흔적이 있었다.
"보고 싶어요." 혜원은 그 세 글자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손님이 떠난 뒤에도, 소이는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슬픔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남기는 방식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혜원은 소이에게 그 그림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그린 그림, 유준이 생각나서 그린 거야?" 소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생각나.
근데 슬프지는 않아. 그냥 보고 싶은 거야." "그렇구나." 혜원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마음이면 충분해." 혜원은 그날, 수첩 맨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1권과 2권을 거치며, 소이는 손님을 만나고, 이해하고, 놓아주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그리움이라는 감정까지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안다. 앞으로 이 아이가 만나게 될 모든 손님들도, 결국은 이런 식으로 소이의 삶 속에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짐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여름밤의 마지막 빛이 창문 너머로 스며들고 있었다. 소이는 그 빛을 등지고 잠들어 있었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혜원은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조용히 불을 껐다. 앞으로 다가올 계절들, 그리고 그 계절마다 찾아올 낯선 이야기들을 향해, 소이의 삶은 계속 흘러갈 것이었다.
창밖 저 멀리, 여름 매미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혜원은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방문을 살며시 닫았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니, 준영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재웠어?" 준영이 물었다. "응, 방금." 혜원은 준영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평범한 저녁의 고요함이, 혜원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다음 손님은 어떤 이야기일까." 혜원이 문득 중얼거렸다.
"글쎄." 준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가서 또 같이 알아가면 되지, 뭐." 혜원은 순간 그 말이 맞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하나씩, 함께.
3권
아무도 모르는 언어 1장 여섯 살이 된 소이는, 이제 몇 달 후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혜원은 입학 준비물을 하나씩 챙기며, 지난 이 년을 돌아봤다. 순임 할머니, 그리고 유준.
두 번의 큰 만남과 이별을 거치며, 소이는 눈에 띄게 의젓해져 있었다. 손님이 찾아오는 밤에도 예전만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하게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소이야, 학교 가면 어떨 것 같아?" 혜원이 물었다.
"재밌을 것 같아. 근데 조금 무섭기도 해." 소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친구들 만나는 거." "손님 얘기는, 새 친구들한테 할 거야?"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은이한테만 말할래. 다른 애들은 아직 잘 모르니까." 혜원은 그 대답에 안도했다.
다은이와의 경험을 통해, 소이는 이제 누구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줄 알게 되어 있었다. 그해 늦봄, 새로운 손님의 첫 신호가 찾아왔다. 처음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밤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소이는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낯선 소리를 흥얼거렸다. 노래 같기도 하고, 그냥 말 같기도 한 소리였다.
그런데 혜원이 아무리 들어봐도, 그건 한국어가 아니었다. "소이야, 그게 무슨 노래야?" 소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
근데 계속 생각나." 혜원은 그 소리를 몇 번이고 다시 불러달라고 부탁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받아 적어봤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음절들이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날 밤, 손님은 다시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 소이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혜원이 물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소이가 처음으로 답답한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는 다
알아들었는데." 혜원은 그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까지의 손님들은 모두 한국어를 쓰거나, 아니면 언어 없이도 감정과 몸짓만으로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손님은 뭔가 달랐다.
혜원은 그 밤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손님. 낯선 언어를 사용함.
정체를 알 수 없음. 소이도 처음으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만남이 될 것 같다." 2장 혜원은 소이가 흥얼거리던 소리를 스마트폰으로 녹음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소이가 다시 그 낯선 노래를 흥얼거릴 때, 혜원은 조심스럽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짧은 몇 소절이었지만, 나중에 다시 들어볼 수 있는 기록이 생겼다. 그날 오후, 혜원은 그 녹음 파일을 인터넷 번역 서비스에 올려봤다.
언어를 자동으로 인식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인식할 수 없는 언어"라는 메시지만 떴다.
혜원은 포기하지 않고, 몇 가지 아시아권 언어로 하나씩 시도해봤다.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심지어 러시아어까지. 어느 것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혜원은 혼잣말을 했다. "그럼 정말 만들어진 옛날 말인가, 아니면 사투리인가." 그날 저녁, 혜원은 다시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이번엔 좀 다른 손님이 왔어요.
소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쓴대요." 외할머니는 잠깐 침묵했다. "그런 경우도 있어. 나도 딱 한 번 들어본 적 있는데, 아주 오래전에, 낯선 사투리를 쓰는 손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하시더라,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됐대요?" "결국 못 알아들었대.
그냥 그렇게 왔다가,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하셨어."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이번에도 그런 결과라면, 소이는 처음으로 손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근데 엄마."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이 아니어도 통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외할머니는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손님이 전하려는 게 꼭 말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
감정이나 몸짓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잖아." 혜원은 그 조언을 마음에 새겼다. 다음 날, 소이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소이야, 그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도 괜찮아.
대신, 그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는 느껴져?" 소이는 그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음… 뭔가 찾고 있는 것 같아. 근데 뭘 찾는지는 모르겠어." "찾는다고?" "응.
계속 두리번거려. 뭔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혜원은 그 대답에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감정과 행동의 패턴은 여전히 전해지고 있었다.
3장 그날 이후로, 혜원은 소이에게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말을 못 알아들어도 괜찮아. 대신, 그 사람이 하는 몸짓을 그림으로 그려볼래?" 소이는 그 제안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소이는 크레파스를 들고 전날 밤 본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그림은 낯선 풍경이었다. 눈 덮인 산과, 나무로 된 낮은 집들.
한국의 익숙한 마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게 어디야?" 혜원이 물었다. "몰라.
근데 그 사람이 자꾸 이 길을 걸어." 두 번째 그림에는 사람의 형체가 등장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건 뭘 들고 있는 거야?" "보따리 같아.
근데 계속 무거워 보여." 혜원은 그 그림들을 조심스럽게 모아뒀다.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시각적인 정보들이 하나둘 쌓여가고 있었다. 며칠 뒤, 소이는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왔다.
이번엔 사람의 얼굴이었다. 주름진 얼굴에, 슬픈 눈빛을 한 노인이었다. "얼굴을 봤어?" 혜원이 놀라며 물었다.
"응, 처음으로. 근데 되게 슬퍼 보였어." 혜원은 그 그림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노인의 옷차림과 배경으로 짐작건대, 뭔가 오래전 시대, 그리고 산이 많은 지역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 뭘 하고 있었어?" 혜원이 물었다.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계속 걸어.
근데 뒤를 자꾸 돌아봐. 뭔가 두고 온 것처럼." 혜원은 그 대답에 마음이 술렁였다. 뭔가 두고 왔다는 것, 그리고 무거운 보따리.
어렴풋하게나마, 이 손님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자, 혜원은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그림으로 소통 시작.
눈 덮인 산, 낮은 집, 슬픈 얼굴의 노인, 무거운 보따리. 뭔가 두고 떠나온 사람인 것 같다. 시대와 지역을 좁혀볼 필요가 있다." 4장 손님에 대한 조사와는 별개로, 일상은 계속됐다.
소이는 입학 전 준비물을 하나씩 챙기며 들떠 있었다. 새 책가방, 이름표, 필통. 혜원은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손님이라는 무거운 이야기와 평범한 초등학생의 설렘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시기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소이야, 새 책가방 마음에 들어?" "응! 근데 무거워." 소이가 가방을 메며 웃었다. 준영은 저녁마다
소이와 함께 한글 공부를 봐줬다. 학교 가기 전에 기본적인 읽기 쓰기는 익혀두는 게 좋다는 주변 조언 때문이었다. 소이는 곧잘 따라왔지만, 가끔은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소이야, 이 글자 뭐야?" 준영이 물었다. "몰라. 근데 아빠, 나 어제 그 손님이 쓴 말 생각났어.
그것도 되게 이상한 글자였을 것 같아." 준영은 그 한마디에 흥미를 느꼈다. "글자를 본 거야?" "아니, 그냥 느낌이. 우리랑 다른 글자를 쓸 것 같아." 혜원은 그 대화를 옆에서 들으며, 문득 어떤 가능성이 떠올랐다.
만약 이 손님이 정말 다른 문자 체계를 쓰는 사람이었다면, 언어학적으로 접근해볼 여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혜원은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찾아봤다. 사라진 방언, 고어, 혹은 다른 지역 언어들에 대한 자료를 뒤적였다.
확실한 단서는 찾지 못했지만,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혜원이 준영에게 말했다. "이북 어딘가의 옛날 사투리 아닐까?
지금은 거의 안 쓰이는." 준영은 그 가능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하네. 눈 덮인 산이랑 낮은 집, 그것도 왠지 그쪽 느낌이고." 혜원은 그 실마리를 붙잡고, 좀 더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보기로 결심했다.
대학 시절 알고 지내던 지인 중에, 방언을 연구하는 교수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연락해볼게요." 혜원이 결심한 듯 말했다. 5장 박 교수는 혜원의 대학 시절 은사였다.
방언과 고어 연구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분이었다. 혜원은 오랜만에 연락을 드려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손님이라는 존재까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말을 흥얼거린다"는 정도로만 전했다. "흥미롭네요. 녹음한 거 있으면 보내주세요." 박 교수가 흔쾌히 말했다.
혜원은 그동안 모아둔 녹음 파일과, 소이가 그린 그림들을 스캔해서 함께 보냈다. 얼마 뒤, 박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가 정확히 확신할 수는 없는데," 박 교수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이 발음 패턴, 함경도 지역의 아주 오래된 사투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그것도 꽤 예전, 그러니까 육이오 전쟁 이전 시기의 말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혜원은 그 말을 듣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함경도요?" "네.
지금은 그쪽 방언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분단 이후로 교류가 끊겼으니까요. 혹시 그림도 보여주실 수 있나요?" 혜원은 소이가 그린 그림들을 다시 자세히 설명했다.
눈 덮인 산, 낮은 나무집, 무거운 보따리를 든 노인. "그림만 봐서는 확실친 않지만," 박 교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향민, 그러니까 전쟁통에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분들의 삶과 비슷한 느낌이 들긴 하네요.
그 시절 많은 분들이 급하게 고향을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으니까요." 혜원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이 짐작이 맞다면, 이 손님은 단순히 낯선 언어를 쓰는 존재가 아니라, 분단이라는 역사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일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별말씀을요. 근데 혜원 씨, 이거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가 그런 옛날 방언을 어떻게 알고 흥얼거려요?" 혜원은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이들 상상력이 좀 풍부해서요." 전화를 끊고 나서, 혜원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함경도, 실향민, 육이오 전쟁. 손님의 정체가 조금씩 구체적인 역사의 얼굴을 갖춰가고 있었다.
6장 그날 저녁, 혜원은 외할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혹시 우리 집안에 함경도 쪽이랑 연관 있는 분 계세요?" 외할머니는 그 질문에 한참을 침묵했다. "함경도라니, 갑자기 왜?" 혜원은 박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외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외증조할아버지가 그쪽 출신이셨어.
젊었을 때 전쟁통에 혼자 남쪽으로 내려오셨다고 들었어." 혜원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정말요? 왜 한 번도 얘기 안 하셨어요?" "나도 잘 몰라.
그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냥 어른들이 가끔 지나가듯 하시는 얘기만 들었지. 고향에 부모님이랑 동생을 두고 혼자 내려오셨다고.
다시 만날 줄 알고 급하게 내려왔는데, 결국 평생 못 돌아가셨대."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름은 아세요?" "덕수... 김덕수 할아버지라고 들었던 것 같아.
정확친 않아." 혜원은 그 이름을 수첩에 조심스럽게 적었다. 다음 날, 소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야, 그 손님 이름이 혹시 덕수 아닐까?" 소이는 그 이름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맞는 것 같아. 그런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 혜원은 그 반응에 확신이 들었다.
이 손님은, 아주 오래전 전쟁통에 가족과 생이별한 채 남쪽으로 내려온 먼 조상, 덕수 할아버지였다. "근데 왜 지금 소이한테 온 걸까." 혜원이 준영에게 물었다. 준영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동안 아무도 그분 이야기를 몰랐으니까. 이제야 후손 중 누군가가 그걸 들을 수 있게 된 거 아닐까." 혜원은 그 소리에 마음이 아려왔다.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분이, 이제야 몇 세대를 건너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방법을 찾은 셈이었다. 7장 그날 늦은 밤,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혜원이 물었다.
"그냥 소이가 계속 손님을 만나게 두면 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뭔가 더 해야 할까." 준영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순임 할머니 때도, 유준이 때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섰을 때 더 좋은 결과가 있었잖아. 이번에도 그렇게 해보는 게 어때." 혜원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외할머니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외할머니 댁을 직접 방문했다. "엄마, 덕수 할아버지에 대해 더 아는 거 있으세요? 사진이라든가, 오래된 물건이라든가." 외할머니는 오래된 상자를 꺼내왔다.
그 안에는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과, 낡은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이거, 외증조할머니가 남기신 유품이야. 나도 자세히는 못 봤는데, 덕수 할아버지 얘기가 있을지도 몰라." 혜원은 그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쳐봤다.
오래되어 글씨가 흐릿했지만, 몇 문장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오빠가 남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거, 순덕 할머니가 쓰신 걸까요?" 혜원이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근데 정확한 건 알 수 없지." 외할머니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혜원은 그 편지를 조심스럽게 사진으로 남겼다.
소이에게도 보여주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 혜원은 소이에게 그 편지 사진을 보여줬다. 소이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이거 순덕이가 쓴 거 맞아.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어." 혜원은 그 확인에 마음이 벅찼다. 이제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모여가고 있었다.
8장 정체를 알게 된 뒤로, 혜원은 소이와 함께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할아버지가 뭘 찾고 있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 혜원이 제안했다. 그 무렵의 어느 밤, 소이는 꿈속에서 조심스럽게 몸짓으로 물음을 건넸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왔다.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덕수 할아버지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댕기머리를 한 아이였다. "이게 누구야?" 혜원이 물었다. "몰라.
근데 할아버지가 이 아이 손을 꼭 잡고 있었어. 그러다가 놓쳤어." 혜원은 그 그림을 보며 마음이 저릿했다. 외할머니가 말했던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이라는 존재가, 이 그림 속 소녀와 겹쳐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소이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 이번엔 작은 물건이었다. 나무로 깎은 듯한 작은 인형, 혹은 노리개 같아 보였다.
"이건 뭐야?" "할아버지가 이거 만들어서 동생 주려고 했대. 근데 못 줬어."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덕수 할아버지가 짊어진 이야기의 윤곽이 점점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전쟁통에 급히 피난길에 올랐던 그는, 동생에게 줄 물건을 미처 전하지 못한 채 헤어졌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그래서 계속 찾아다니는 걸까?" 소이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 혜원이 대답했다. "동생을 다시 만나서, 그 물건을 전하고 싶으신 거겠지." "근데 이제 동생분도 돌아가셨을 텐데." 혜원은 그 얘기를 듣자 잠깐 침묵했다.
맞는 말이었다. 육이오 전쟁이 언제였는지를 생각하면, 그 동생도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혜원이 준영에게 물었다.
준영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직접 만나게 해줄 순 없어도, 뭔가 대신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그 마음을 전할 방법." 혜원은 그 말을 곱씹으며,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9장 며칠이 흐른 뒤, 혜원은 대한적십자사에서 운영하는 이산가족 찾기 기록을 뒤져보기로 했다. "동생분 성함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혜원이 중얼거렸다. 잠자리에 든 그날 밤, 소이는 다시 손님을 만났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조금 특별한 소식을 전했다. "이름 알아냈어. 이번엔 좀 더 확실했어.
'순덕'이라고 했어." 혜원은 그 이름을 듣고 곧바로 적었다. 순덕, 덕수의 동생. 이름의 돌림자가 겹치는 걸 보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혜원은 이산가족 찾기 기록 사이트에 접속해, "순덕"과 "함경도"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다. 수많은 기록들 속에서, 비슷한 이름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참을 뒤지던 중, 눈에 띄는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김순덕. 함경남도 출신. 오빠 김덕수를 찾습니다.
1953년 등록." 혜원은 그 기록을 보고 심장이 뛰었다. 동생도 살아남아, 남쪽으로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빠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이거예요!" 혜원은 흥분해서 준영을 불렀다. 기록에는 당시 순덕이 살던 지역과, 등록 당시 나이 정도만 나와 있었다. 혜원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혹시 후손이 남아 있는지 좀 더 조사해보기로 했다.
그날 밤늦게, 혜원은 소이에게 이 사실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소이야, 할아버지 동생분도 남쪽으로 내려오셨대. 그리고 오빠를 계속 찾고 있었대." 소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커졌다.
"진짜? 그럼 만났어?" "아니, 기록만 보면 결국 못 만나신 것 같아. 그때는 서로 어디 있는지 찾을 방법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으니까." 소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두 분 다 서로 찾고 있었는데, 못 만난 거야?" "그런 것 같아." 혜원이 안타깝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 밤에 할아버지한테 알려줘야겠다." 소이가 결심한 듯 말했다.
"동생분도 오빠 찾고 있었다고." 혜원은 그 말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비록 두 사람이 생전에 만나지 못했지만, 적어도 서로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장 그날 밤, 소이는 유난히 오래 잠들어 있었다.
혜원은 딸의 방문 앞을 서성이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상상해봤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손님에게, 소이가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눈가가 촉촉했다. "소이야, 괜찮아?"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소이는 그림을 그리듯 손짓으로 순덕이라는 이름을 표현하고, 종이에 어렴풋이 그 이름의 글자 모양을 흉내 내 보여줬다고 했다. "처음엔 못 알아듣는 것 같았어.
근데 계속 그 이름을 반복하니까, 할아버지 표정이 변했어." "어떻게 변했는데?" "울기 시작했어. 근데 슬픈 울음 같지는 않았어." 혜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확한 말은 전해지지 않았어도, 이름 하나가 가진 힘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것 같았다.
"그다음엔 어떻게 했어?"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 나무 인형 그림을 다시 보여줬어. 근데 이번엔 좀 달랐어. 그걸 순덕이한테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나한테 주는 것 같았어." 혜원은 그 대답에 놀랐다.
"너한테?" "응. 마치… 이제 이걸 대신 전해달라는 것처럼." 혜원은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덕수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짊어져온 그 미련이, 이제 소이를 통해 다음 세대로 넘겨지려 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혜원은 준영과 이 상황을 의논했다. "실제로 그 나무 인형을 만들어서, 순덕 할머니의 후손을 찾아 전해드리면 어떨까." 혜원이 제안했다. 준영은 그 생각에 동의했다.
"그럴듯한 방법이네. 실제 물건은 아니어도, 그 마음만은 전할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그날부터, 순덕의 후손을 찾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11장 혜원은 대한적십자사에 정식으로 문의를 넣었다.
이산가족 기록에 남아 있는 김순덕이라는 이름의 후손을 찾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담당자는 개인정보 문제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안내했지만, 최대한 도와보겠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혜원은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정리했다.
소이의 그림들, 녹음 파일, 박 교수의 자문 내용, 그리고 적십자사 기록까지. 마치 하나의 작은 연구 보고서처럼 두툼해진 서류철이 만들어졌다. 12장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며칠이 지나도 적십자사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혜원은 매일 우편함을 확인하고,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연락 왜 안 올까." 혜원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준영이 그런 아내를 다독였다. "원래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야.
조급해하지 말자." 그 사이, 소이는 매일 밤 덕수 할아버지를 계속 만났다. 손님의 상태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뭔가를 찾아 헤매던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차분해진 것 같다고 소이는 말했다.
"할아버지가 요즘은 덜 슬퍼 보여." 소이가 말했다. "기다리는 것도 이제 괜찮은가 봐." 혜원은 그 한마디에 조금 안심이 됐다. 손님도, 가족들도, 모두 함께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는 셈이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소이는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엄마, 만약 후손을 못 찾으면 어떻게 돼?" 혜원은 그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못 찾더라도, 할아버지 마음은 우리가 알아드렸잖아." 소이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것도 의미 있는 거지?" "당연하지." 혜원이 딸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 마침내 혜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대한적십자사였다. 13장 몇 주 뒤, 적십자사에서 연락이 왔다.
놀랍게도, 순덕의 손녀가 아직 생존해 있으며, 연락이 닿았다는 소식이었다. "저희가 사정을 설명드렸더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담당자가 전했다. 혜원은 그 소식을 듣고 벅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곧바로 소이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소이야, 순덕 할머니의 손녀분을 만날 수 있게 됐어." 소이는 순간 활짝 웃었다. "진짜?
그럼 할아버지 얘기 전해줄 수 있는 거야?" "응,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약속된 날, 혜원과 소이는 순덕의 손녀, 수진을 만나러 갔다. 수진은 칠십 대의 온화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저희 할머니가 평생 오빠 얘기를 하셨어요." 수진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오빠가 살아있다면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고 하셨거든요." 혜원은 조심스럽게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했다. 소이가 겪은 일, 덕수 할아버지의 방문, 그리고 순덕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수진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울었다.
"두 분 다, 서로를 그렇게 찾고 계셨던 거네요. 평생을." 소이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수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가 이거 전해달라고 했어요." 소이는 그렇게 말하며, 준비해온 나무 인형 그림을 보여줬다.
혜원과 준영이 함께 만든, 그림 속 모습과 최대한 비슷하게 깎은 작은 나무 인형이었다. 수진은 그 인형을 받아 들고,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14장 그날 저녁, 수진은 혜원과 소이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수진은 낡은 앨범을 꺼내, 순덕이 살아온 세월을 보여줬다. 전쟁 이후 홀로 남쪽에 정착해 고생스럽게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키워낸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평생 오빠를 그리워하며, 명절이 되면 늘 북쪽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언젠가 오빠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으셨어요." 수진이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할머니 마지막 사진이에요." 사진 속 순덕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 어딘가에는 오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소이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할아버지가 그린 동생 얼굴이랑 똑같아요. 어릴 때 얼굴이긴 하지만." 수진은 그 소리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럼 정말 우리 할머니가 맞나 보네요." 혜원은 그날 대화에서, 순덕이 생전에 오빠와의 이별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는 걸 알게 됐다. 피난길에 갑자기 놓친 손, 그리고 다시는 찾지 못한 그 손. 그 기억은 순덕의 평생을 따라다녔다고 했다.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수진이 말했다. "그날, 오빠가 손을 놓친 게 아니라, 자기가 사람들 틈에 밀려서 놓쳤다고. 그게 평생 죄책감이었대요." 혜원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저릿했다.
덕수 할아버지도, 순덕 할머니도, 각자 자신이 놓친 손에 대해 평생 자책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오늘 밤에," 소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한테 그것도 전해줘야겠어요.
순덕 할머니 잘못이 아니었다고." 혜원은 딸의 그 배려심에 다시 한번 마음이 뭉클해졌다. 15장 그 밤, 소이의 꿈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여느 때처럼 눈 덮인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번엔, 소이가 먼저 다가가 덕수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말은 여전히 통하지 않았지만, 소이는 손짓과 표정으로 천천히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소이는 먼저 순덕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손으로 오래 살았다는 몸짓을 표현했다. 주름진 얼굴, 지팡이를 짚는 시늉, 평온하게 눈을 감는 몸짓까지. 덕수 할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이는 이어서, 수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몸짓으로 전하려 애썼다. 손을 놓친 게 순덕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사람들 틈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는 것.
소이는 손을 맞잡았다가, 억지로 떼어지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잘못 아니야"라는 뜻을 담아서. 덕수 할아버지는 그 몸짓을 한참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뭔가 알아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소이는 품에서 작은 나무 인형을 꺼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수진에게 건네는 몸짓을 반복했다. "전달했어요"라는 뜻이었다.
덕수 할아버지는 그 모든 몸짓을 지켜보며, 서서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소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뱉었다. 한국어였다.
"고맙다." 소이는 그 짧은 두 글자에 놀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알아들은 적 없던 말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할아버지, 한국말 할 수 있었어요?" "조금은...
잊어버렸었는데, 이제 생각났다." 덕수 할아버지가 서툰 발음으로 대답했다. "네 덕분에." 소이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통하지 않던 언어의 장벽이, 진심이 전해지는 순간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16장 그날 이후로, 덕수 할아버지는 매일 밤 조금씩 한국어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어눌하고 느리지만, 소이는 이제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덕수는 열일곱 살에 전쟁을 만났다.
갑작스러운 피난길, 온 가족이 함께 남쪽으로 향하던 중, 혼란한 인파 속에서 어린 여동생의 손을 놓쳤다. "다시 찾으려고 했다. 근데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그리고 곧 포탄 소리가 들려서, 어른들이 다들 도망가야 한다고 했다." 덕수는 그렇게 홀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부모님도, 다른 형제들도 그 혼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평생 그 누구와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남쪽에서 새로 가정을 꾸렸다. 자식도 낳고, 나름대로 살았어. 근데 순덕이 생각은 하루도 안 잊은 날이 없었다." 소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아려왔다.
"할아버지도 가족이 있었어요?" "있었지. 근데 다 오래전에 세상 떠났어.
나도... 아마 오래전에 죽었을 거다." 소이는 그 얘기를 듣자 순간 멈칫했다. "할아버지, 언제 돌아가셨어요?" 덕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잘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계속 걷고 있었어. 순덕이를 찾으려고.
그게 얼마나 오래됐는지도 모르겠다." 소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죽은 뒤에도, 덕수 할아버지는 그 오랜 세월을 동생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이제 알았다." 덕수가 말을 이었다.
"순덕이도 나를 계속 찾고 있었다는 거.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소이는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됐지만, 동시에 이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17장 며칠 뒤, 소이는 유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혜원은 그 밤의 숨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유난히 평온하고, 유난히 깊은 숨. 마치 뭔가 마무리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이는 눈을 뜨자마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 만났어?" 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이는 그렇다는 듯 미소 지었다.
"마지막이었어." 소이는 천천히 그 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꿈속에서, 덕수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눈 덮인 산이 아니라, 따뜻한 봄날의 들판에 서 있었다. 꽃이 만발한 풍경이었다.
"이제 됐다." 덕수가 그렇게 말했다. "순덕이도 나를 찾고 있었다는 거 알았고, 그 아이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그 인형도, 결국 전해졌으니까." "이제 가시는 거예요?" 소이가 물었다.
덕수는 동의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제 순덕이한테 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찾으면 뭐라고 하실 거예요?" 덕수는 그 질문에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그거면 될 것 같다." 소이는 그 대답에 눈물이 났다.
"저도 할아버지 안 잊을게요." 덕수는 소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고맙다, 아가야. 네 덕분에 이렇게 오랜 시간 만에, 다시 말을 할 수 있었다.
네 덕분에 순덕이한테 갈 수 있게 됐다." 풍경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꽃밭 위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덕수의 모습이 그 빛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건, 아주 작지만 또렷한 한국어였다. "고맙다. 잘 있어라." 18장 혜원은 그날 저녁, 수진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덕수 할아버지가 떠나셨어요. 이제 순덕 할머니를 찾아가실 수 있게 됐대요." 전화기 너머로, 수진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정말 감사해요.
저희 할머니도, 그 할아버지도, 이제 서로 만나셨겠네요." "확실친 않지만, 아마 그럴 거예요." 혜원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얼마 뒤, 수진은 혜원과 소이를 다시 초대했다. 이번엔 조촐한 식사 자리였다.
수진은 소이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복사한 액자였다. 순덕이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이거, 소이가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수진이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찾던 오빠분을, 결국 소이가 만나게 해준 거니까요." 소이는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식사 자리에서, 수진은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됐는데도 이제야 완전히 보내드린 기분이에요. 소이 덕분에요." 혜원은 그 말을 들으며, 손님이라는 존재가 남긴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단순히 소이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여러 사람의 오랜 상처를 함께 아물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이는 차 안에서 그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엄마, 나 이제 알겠어." 소이가 문득 말했다.
"뭘?" "말이 안 통해도, 진심은 통한다는 거." 혜원은 그 한마디에 미소 지었다. 딸이 이번 여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앞으로의 삶에 큰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19장 그해 여름의 끝자락, 혜원은 다시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이번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덕수 할아버지의 이야기, 순덕 할머니의 기록, 그리고 수진과의 만남까지. 외할머니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결국 이야기가 이어지는구나." 외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집안 여자들이 짊어져온 이 체질이, 이럴 때 보면 참 귀한 일 같기도 해."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혜원이 물었다. "그럼.
처음엔 나도 이게 짐이라고만 생각했어. 근데 소이를 보면서 알았지. 이건 그냥 짐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거더라." 혜원은 그 말을 듣고 깊이 공감했다.
순임 할머니, 유준, 그리고 덕수 할아버지까지. 소이를 거쳐 간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매듭이 되어주었다. 그날 저녁, 외할머니는 소이를 따로 불러 앉혔다.
"소이야, 할머니가 하나 물어봐도 될까?" "네, 할머니." "손님들 만나는 거, 힘들지 않아?" 소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끔 힘들어요. 근데 도와줄 수 있어서 좋아요." 외할머니는 그 대답에 흐뭇하게 웃으며, 소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소이, 정말 대견하다. 할머니도 어릴 때 손님 몇 번 만났었는데, 너처럼 이렇게 잘 해내지는 못했어." "할머니도 무서웠어요?" "많이 무서웠지. 근데 너를 보면서, 이제야 이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아.
무서운 게 아니라, 특별한 거였구나 하고." 소이는 순간 환하게 웃었다. 여름의 마지막 햇살이 창문 너머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20장 봄이 되고, 드디어 소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 밝았다.
새 책가방을 메고, 소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교문 앞에 섰다. 혜원과 준영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 뭉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떨려?" 혜원이 물었다.
"조금." 소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괜찮을 것 같아." 교실로 들어서기 전, 소이는 문득 뒤돌아 부모를 바라봤다. "엄마, 아빠.
나 잘 갔다 올게요." 그 인사가 유난히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혜원은 지난 몇 달간의 여정을 떠올렸다.
낯선 언어를 쓰던 손님, 그리고 그 손님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소이는 눈에 띄게 성장해 있었다. 교실 안에서, 소이는 낯선 친구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에는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안녕, 나는 소이야." 소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나는 준서야." 아이가 수줍게 대답했다. 두 아이는 금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만화, 좋아하는 간식, 그리고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들.
평범하고 즐거운 대화였다. 혜원은 교실 밖 복도에서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소이는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혜원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이는 이제 두 가지 언어를 배우게 될 것이다. 하나는 학교에서 배울 글자와 문법.
다른 하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또 다른 언어. 그리고 그 두 번째 언어는, 이미 누구보다 능숙하게 익혀둔 상태였다.
21장 몇 주가 지나며, 소이는 학교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갔다. 준서와는 금세 단짝이 됐다. 다은이와는 다른 학교로 배정됐지만, 주말마다
만나 놀기로 약속했다. 소이의 하루하루는 손님도, 낯선 기억도 없이, 온전히 일곱 살,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어느 날 국어 시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했다.
소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꿈에서 간 여행도 되나요?" 선생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야." 소이는 그날, 눈 덮인 산과 봄날의 꽃밭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썼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쓰지 않았지만, "낯선 곳에서 온 친구를 만나, 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 도와줬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그 글을 읽고 감탄했다. "소이가 상상력이 참 풍부하네.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를 쓸 줄 알고." 소이는 그 칭찬에 수줍게 웃었다. 아무도 그 이야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걸 몰랐지만, 소이는 그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것들을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소이는 그 글을 혜원에게 보여줬다. "이거 학교에서 썼어. 선생님이 칭찬해주셨어." 혜원은 그 글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짧고 서툰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누구보다 깊었다. "참 잘 썼다." 혜원이 딸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22장 그해 첫 여름방학, 소이는 오랜만에 다은이와 만나기로 했다. 다은이는 다른 학교로 진학해 있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여전했다. 놀이터에서 만난 두 아이는, 서로 밀린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이야, 너 요즘도 손님 만나?" 다은이가 물었다. "응, 얼마 전에 만났었어. 근데 이번엔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할아버지였어." "진짜?
그래서 어떻게 했어?" 소이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줬다. 그림으로 소통한 것, 방언 전문가를 만난 것, 그리고 결국 순덕 할머니의 후손을 찾아낸 것까지. 다은이는 눈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완전 신기하다. 나도 그런 능력 있었으면 좋겠어." 소이는 그 소리에 웃으며 대답했다. "가끔 힘들 때도 있어.
근데 도와줄 수 있어서 좋아." "너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다은이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이렇게 밝잖아." 소이는 그 칭찬에 수줍게 웃었다. 두 아이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네를 타며 이야기를 나눴다.
손님이라는 특별한 이야기와, 여름방학 숙제라는 평범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혜원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놓였다. 소이에게는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든든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이는 혜원에게 말했다. "다은이랑 있으면 편해.
얘기해도 되니까." "다행이다." 혜원이 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 친구, 오래오래 곁에 뒀으면 좋겠다." 23장 그해 여름, 혜원은 오랜만에 수첩을 펼쳐 지난 몇 달을 정리했다. 순임 할머니와 유준에 이어, 이번엔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손님 덕수 할아버지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결국 마음이 전해진 이야기였다. 혜원은 수첩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소이,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넘어가는 시기.
처음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손님을 만났다. 그러나 소이는 포기하지 않고, 그림과 몸짓, 그리고 진심으로 소통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이 아이는 이제, 언어의 장벽조차 넘어설 줄 안다." 혜원은 펜을 내려놓고, 거실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이제 화분이 세 개로 늘어 있었다. 순임 할머니를 위한 것과 유준을 위한 것, 그리고 얼마 전 덕수 할아버지를 기리며 새로 심은 것까지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 세 개의 화분이 나란히 창가에 서서, 저마다
다른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혜원은 그 모습을 보며, 소이가 만나온 손님들이 하나씩 이 집 안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거실 반대편에서는 소이가 준서와 통화하며 깔깔 웃고 있었다.
평범하고, 행복한 일곱 살 소녀의 저녁이었다. 혜원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소이의 삶은 앞으로도 이렇게, 평범한 일상과 특별한 만남이 나란히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모든 걸 헤쳐나갈 것이다. 창밖으로 여름 저녁의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혜원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다음 손님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조용히 궁금해졌다.
이제는 그 궁금증조차,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에 가까웠다. 밤이 깊어지자, 준영이 퇴근하고 돌아와 가족이 다 함께 저녁을 먹었다.
소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준서와 함께 그린 그림, 급식으로 나온 맛있는 반찬,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현장학습 이야기까지. 혜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일 년 반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이 문득 하나로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순임 할머니의 창가, 유준의 자동차, 덕수 할아버지의 눈 덮인 산.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렇게 밝고 씩씩하게 웃는 소이가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소이는 창가로 다가가 세 개의 화분에 물을 줬다.
작은 손으로 하나씩,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물을 나눠 부었다. "얘네도 다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거지?" 소이가 문득 물었다.
"응, 맞아." 혜원이 대답했다. "나도 나중에 크면, 내 이야기도 누군가한테 전해질까?" 혜원은 그 질문에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딸을 꼭 안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네 이야기는, 지금도 이미 충분히 소중해." 소이는 그 말에 환하게 웃으며, 다시 화분에 남은 물을 마저 줬다.
창밖 노을이 세 개의 화분과 소이의 웃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서명
타인의 계절 제1부 유년기 발 행 | 2026년 7월 27일 저 자 | 오후세시 펴낸이 | 한건희 펴낸곳 | 주식회사 부크크 출판사등록 | 2014.07.15.(제2014-16호) 주 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1로 119 SK트윈타워 A동 305호 전 화 | 1670-8316 이메일 | info@bookk.co.kr ISBN | 979-11-12-25022-3 www.bookk.co.kr ⓒ 오후세시 2026 본 책은 저작자의 지적 재산으로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